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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광란의 야간 자율 학습(3) 며칠 뒤.
내 절망적인 의사와는 관계없이, 엘리데인 아카데미는 본격적 야간 자율학습 기간에 돌입했다.
오후 7시부터 진행되는 수업은 아카데미의 제2구역에서 이어지는데, 신입생의 수업을 맡은 각 교수가 돌아가며 한 번씩 수업을 진행하게 된다.
이를테면 지금 첫 번째 수업을 맡는 교수는 한스.
게임 속에서는 자주 다뤄지지 않던 엑스트라 포지션의 교수였기에 기억은 잘 없지만, 체력 관련 수업을 맡은 이였다.
“……그러니 쉽게 말해, 체력이란 국력과 같다 할 수 있겠습니다. 어디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마법을 쓰든, 다른 날붙이를 쓰든 체력이 부족하면 장기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 부디 외적 화려함에 속아 체력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요컨대, 처음 내가 스탯을 찍을 때 고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체력이라는 게 더럽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나는 남들과 달리 한계선이 명확한 게 문제지만.
‘15라니… 남들의 반까지밖에 성장할 수 없다니…….’ 어쩔 수 없다.
새삼스럽지만 처음 캐릭터 설정 때 괜히 특성을 집어넣은 날 탓해야지. 세상 탓을 시작하면 자고로 끝이 없는 법이다.
나는 턱을 잠시 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업을 듣는 소위 말해 엘리트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먼발치에 떨어져 앉은 리온은 꽤 집중하고 있었다. 마법이 주력인 녀석인 만큼 따분할 텐데 용케 잘도 버틴다 싶다.
하기야, 저런 책임감 없이는 감히 사령 가문의 어린 가주라고 불릴 수 없겠지.
“체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반복적인 훈련과 중량. 그리고 무엇보다 프로틴의 주기적인 섭취가 반드시 요구되며…….”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탈리아가 있다. 그것도 꽤 눈을 반짝이며 수업을 듣고 있는 모습이다. 걱정이 한결 덜어진다.
‘그래도 괜찮아진 것 같아 다행이네.’ 나와 황녀의 소식을 듣고 한동안 칩거했다기에 걱정을 했었는데. 이 정도면 무난히 어찌어찌 나쁘지 않게 넘어간 듯하다.
물론 이따금 그녀의 시선이 나를 마주치는 데다, 의미 없이 웃기도 해서 무섭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는 명백히 나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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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홀덤 엠마가 노력한 결과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겐 호재였다.
스틸라이너 가문과 리인하버가 세이프게임 틀어지기 시작한다면?
아무리 나라도 커다란 변수가 생겼을 때 이를 막을 힘은 아직 없다. 그러니 지금은 최대한 웅크린 채 숨을 죽여야 한다.
타이밍을 기다리며, 메인 스토리를 공략하고 끝에 도달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이다. 세이프파워볼
“녹스 폰 리인하버 군. 마력을 사용하는 마도사와 마투사의 가장 취약한 급소 세 군데를 말씀해 보십시오.” 교관 한스가 갑작스레 물어온다.
나는 별안간 몰려오는 잠을 쫓아낸 뒤 차분히 일어났다.
“상, 중, 하단전입니다.” “정답입니다. 앉으십시오.” 한스는 뿌듯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나라는 망나니에게 파워볼사이트 지식을 알려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쁜 걸까?
교수의 입장이 돼 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다. 파워볼게임사이트
나는 가만히 앉아, 이너 루나틱의 설정에 관해 되뇌어 보았다.
조금 전 내가 답했던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에 관한 것이다.
상단전.
이는 일반적으로 머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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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이 집약되며, 회로를 통해 복잡한 연산 과정을 처리하는 데 주로 사용된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이 사용할 수 있다.
중단전.
이는 심장 부위를 의미한다.
자연스레 마력이 흐르며, 몸 전체로 피처럼 흘려보내는 펌프 역할을 한다. 꽤나 다루기 어려워 중급자 이상은 되어야 이를 개방하는 게 가능하다.
하단전.
이곳은 배꼽 아래 두 마디 정도 부근을 의미한다.
이는 심상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주는데, 쉽게 말하자면 제 스스로 내적 수련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설명부터 알 수 있지만, 이를 해내는 자들은 이후 하나같이 현자라 불리며 대륙의 지고지순한 존재로서 불리게 되었다.
이를테면 마법사로서 정점에 오른 노아.
혹은 검으로 정상에 도달한 루나와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단, 이곳이 봉해지면 누구든 다신 마법과 마력을 담은 검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에 조심해서 다뤄야 하지만 말이다.
‘뭐, 나로서는 한참이나 가야 할 경지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설정 자체는 무협이나 게임 등에서 차용해 온 것 같다.
이너 루나틱은 이곳저곳에서 괜찮아 보이는 소재나 설정을 작품의 고유 분위기에 잘 녹여내는 것으로 유명한 작품이었으니까.
새삼 설정을 되새기며 교수의 강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은근히 옆에 앉아 향취를 풍겨내는 한 여자를 본 뒤, 한숨을 내뱉는다. 페넬로페 황녀. 지금 내 곁에는 그녀가 앉아 있거든.
“왜요?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자의식이 과잉이시군요.” 천연덕스럽게 물어오기에 나는 재빨리 부정했다.
페넬로페가 쿡쿡 웃어댔다.
조금 전, 자리에 앉을 때. 그녀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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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감 후보라고는 해도, 어차피 약혼이나 다름없는 상태인데… 옆자리에 앉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의심할걸요?
-…….
부정할 수 없는 말이긴 했다.
엘리데인에서는 애초에 이와 같은 교류 및 연애가 장려된다.
귀족들이 대개 모이는 만큼 서로 가문의 규모를 키우고, 세를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자주 포착되곤 하기 때문이다.
이를 제지할 이유는 당연히도 아카데미에 없었다.
……하지만 황녀까지 이러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지만, 결국 삼켜내는 데 그쳤다.
딱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조금만 버티면 되겠지.
고작해야 일주일이고, 마지막 날에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교수도 따로 지키지 않는 데다, 아카데미 지하 미궁 공략법 따위는 이미 싹 다 외우고 있으니까.
딩동~!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보다 이른 시점에 첫 수업이 모두 종료되었다. 야간 자율학습이라고는 하지만, 주입식 교육의 장인 대한민국.
그곳에서 살아온 나였기 때문일까?
딱히 힘들다거나 하지 않았다.
물론 야자를 실제로 해본 기억 따윈 없지만…….
어쨌든 한국인인 만큼 나도 당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된다.
‘그래도 약간 지치긴 하네…….’ 사실 따지자면 이건 페넬로페 덕분이긴 하지만…….
어디 말할 수도 없으니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저는 먼저 가볼게요?” “들어가십시오. 황녀님.” 페넬로페가 먼저 인사를 건넸고, 이어 에키드나까지 덩달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자연스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숙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황녀에게는 망나니짓을 하기 어렵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다. 특히 나를 주기적으로 괴롭히고 매도한 저 녀석은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어쨌든 두 사람이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가고 나도 짐을 쌌다. 아공간 주머니에 수업에 사용된 교재를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어째서일까?
뒤편에서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 느껴진다.
‘이건 대체…….’ 마치 원초적인 공포와 마주한 듯한 감각이 이어진다.
아주 생소한…….
누군가의 먹잇감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재빨리 뒤를 돌자, 그곳에는 웃음기를 지운 탈리아가 있었다.
“안녕, 녹스?” 뭐지?
의문이 깊게 번진다.
사실 원래도 탈리아는 이렇게 내게 불쑥 나타나곤 했다. 그렇기에 딱히 그 행동에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워낙 자주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약간 불안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속칭 위기 감지 센서가 반응한다. 더듬이가 움찔거리는 것이다.
‘어디선가 한기가… 노아 학장이라도 떴나?’ 태연하게 그 생각을 하다, 이내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차라리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탈리아가… 웃고 있었던 것이다.
섬뜩함이 느껴지며, 도움을 요청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나, 엘레노어는 어깨를 으쓱한 뒤 사라져버렸고, 리온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나갔다.
강의실에는 그녀와 나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특성 ‘연기의 귀재’가 강하게 흔들립니다!] 이건 몰렸다.

사면초가의 상황에 직면하자, 나는 연기가 흔들릴 정도로 포커페이스 유지가 잘되지 않았다.
지금의 내 상황이 어떠한가?
비록 내 의지는 아니었다고는 하나, 구 여자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잠수 이별을 한 뒤 재회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이런 막장 스토리는… 요즘 드라마에서도 잘 안 나온다고!’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건 아무래도 위험하다.
“녹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탈리아의 눈이 죽어있다. 입은 웃고 있지만, 그 속내는 아마 짐작기도 어려운 상태일지 모르는 것이다.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자리를 피하는 것이겠지.
“……내가 지금은 조금 바빠서 가봐야겠군.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 턱.
침착하게 등을 돌렸지만, 어깨를 붙드는 체온이 느껴진다.
이건… 더는 못 도망치겠는데.
절망에 서 있던 내게 탈리아가 다가오며 말해왔다.
“페넬로페 황녀님과 있었던 일 말이야……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혹시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었어?” “음…….”
나는 침음하며 최대한 말을 돌릴 방법을 생각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최대한 꺼내지 않으려 했던 이야기였으나 지금 시점에서는 꺼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만에 하나, 여기서 그녀에게 황성에서의 이야기를 오픈하지 않고 막 나간다?
이는 목숨이 세 개여도 절대 해선 안 되는 짓이다.

더구나 나와 그녀의 관계 개선은 굳이 필요 없다지만…….
탈리아의 멘탈이 흔들리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바알 처치 원정대의 핵심 멤버 중 하나가 아닌가.
뭐. 그 말인즉슨, 나를 죽일 멤버 중 하나라는 이야기도 되긴 하지만…… 어쨌든 핵심 인물을 악인으로 만들 수는 없다.
여기서 악인은 나 하나로 족하다.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종류가 뭔데에?” 탈리아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진다.
“아! 혹시 페넬로페 황녀님이랑 약혼해버린 거 말하는 거야?” 쿵. 심장에서 만약 소리가 난다면 다음과 같은 음이 들려왔을 것이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의 탈리아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마치 뒤에 ‘나한테 일정 상의도 없이.’와 같은 말이 덧붙어 있는 기분이다. 이제 환청까지 들리기 시작하다니.
나는 절실한 마음으로 한 사람을 원망했다.
‘페넬로페… 나랑 연기하는 것도 좋고 이용하는 것까지도 이해하는데, 얘는 어떻게 해 줘야지 도망가면 어떡하냐고…….’ 한데 그때였다.
흑화(?)한 탈리아로부터 차분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 것은.
“그런데 딱히 걱정하는 건 아니야.” “…뭐?”
저도 모르게 그렇게 볼품없는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녀가 이었다.
“사실 잘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렇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더라고. 어차피 황녀께서는 남편 후보가 무지하게 많으실 거잖아?” ‘지금은 나밖에 없긴 한데…….’ 나는 그 말을 꾹 삼켰다.
아무리 나라도 이 정도 눈치는 있다.
“그러니까. 혼인을 실제로 할 확률도 낮을 거고…… 거기다 녹스가 갑자기 사라져버리거나 하면… 어차피 혼인은 못 하게 되잖아. 안 그래?” 왜 사라지는데 내가.
하고 묻지는 못했다.
정말 영영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젠장…….’
어쩐지 후후, 하고 웃는 웃음에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두려움을 느끼며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런 뒤, 지나친 공포에 질려버린 탓일까?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고 말았다.
“……넥타이는 안 매주시더군.” “응?”
“황녀님 말이다.” 내 말에 두 눈을 부릅뜨며 억지로 방긋 웃고 있던 탈리아의 표정이 잠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 하며 당황한 얼굴.
이윽고 그녀가 옅게 볼을 붉혔다.
그러더니 잠시 뒤를 돌아 작게 소곤거리기 시작한다.
“그렇구나… 녹스는 넥타이를 매주는 쪽이 좋은 거구나. 그래… 그렇다면야 승산이 좀 더 생겼으니 괜찮을지도…….” 승산?
하지만 이것 또한 자세히 묻지 못했다.
나는 무엇보다 내 목숨이 소중한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은 닥치고 있자. 이게 최선이라는 것에는 어떠한 이견도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별안간 탈리아가 활짝 웃으며 말해왔다.
“최후의 방법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겠어!” 최후의 방법…….
나는 그걸 듣게 되는 일이 없길 바라며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가 안 돼. 나조차도 왜 그런 아이 같은 행동을 해 버린 건지.’ 나는 일전의 녹스와의 일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며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키드나를 보며 묻는다.
“에키드나, 혹시 아나요? 제가… 어째서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해버린 건지.” “녹스 폰 리인하버…… 그자와의 혼인 말씀입니까?” “그래요.”
달빛이 차창을 통해 시두스관 최상층 내부로 흘러들어온다.
에키드나의 고민하는 표정이 눈에 선명히 들어온다.
나는 가만히 달빛을 받으며 침대에 누워 이질적인 한 존재를 떠올린다.
녹스 폰 리인하버.
감히 황녀인 내 지휘권을 빼앗아 가고 멋대로 구한 주제에, 황성에서 오라버니를 바보로 만들어 버린.
그야말로, 압도적인 재능.
‘대체 그는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거지? 아무리 봐도 지금까지 망나니 같은 행보는 보이지 않고 있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그의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던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섣불리 이해 가지 않아.
녹스는 분명 강하고 제멋대로다. 하지만… 표현 방식이 서툴다 해도 악인은 아니다. 적어도 내가 본바, 그는 되레 선인에 가깝다.
그런데 왜 억지로 나쁜 척을 하는 걸까.
예감이 늘 맞는 것은 아니지만 녹스는 어째서인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한 번 나는 의문에 사로잡힌다.
연기하는 것까지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무엇을 얻기 위해서?

그는 무엇을 위해 연기하는가?
자신의 가문에는 이미 충분할 만큼의 돈과 권력이 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으며. 자신처럼 알력다툼에 의해 희생당하지 않아도 된다.
리인하버 가에서 형제끼리 피바람이 분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곁가지처럼 늘어나다, 이내 멎으며 피식 미소가 새어 나온다.
하긴, 연기하고 있는 건 나도 마찬가지구나.
페넬로페 폰 아크하임―.
예쁜 이름이 있긴 하지만 세간에서 나를 부르는 이름은 ‘황녀’다.
나는 언제나 기품 있고, 절도 있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야 한다. 그것이 대제국 아크하임의 황녀로서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러니 아파도, 고통스러워도 항상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실은 내가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닐진대도, 나는 나를 속이며 매일 아침 거울을 본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너는 강한 사람이야.
너는 사람들에게 존경받아야 해.
너는…….
누군가에게 하는 것이 아닌, 나를 속이기 위한 연기를.
나는 매일같이 하고 있다.
“웃긴 일이야.” 다시 나를 심란하게 만든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다.
녹스. 사실 처음에는 그를 포섭하는 데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그는 말하자면 어떻게 봐도 킹 메이커의 자질을 타고났으니까.
재능이 있는 데 반해, 뒷배도 없다.

지원자도 없으니 자신이 그를 돕는다면 그는 금세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노아 학장까지 녹스를 인정하지 않았던가.
암흑가의 자재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긴 하지만, 어차피 망나니. 가문과 의절하고 내게 의지하게 한다면, 어떻게든 그를 포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처음 마차에서 제안했다.
나와 함께 하자고.
가문은 버리고 제국의 앞잡이가 되어 달라고.
하지만 녹스는 처음에 이를 거절했다.
나는 그게 단순한 가문에 대한 공포 탓이라 생각했다.
하나, 아니었다.
두 번째. 황자인 오라버니를 쓰러뜨린 뒤 다시 제안했을 때.
그는 다시 한번 같은 답을 들려주었다.
때문에 나는 내가 내걸 수 있는 최선을 그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그것이 구속구가 되든 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혼인까지 걸어서 그를 설득할 거라고는 스스로도 생각지 못했지만.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페넬로페 황녀님, 이미 황가와 원로원… 아크하임 가문의 가신들이 한바탕 뒤집혔습니다.” 에키드나가 불안한 기색으로 아크하임 제국의 대신과 관료들의 행동을 보고했다. 녹스를 배필의 후보로 선택한 뒤, 이들 사이에서 온갖 추문이 터져 나오는 중이다.
걱정은 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심각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내 기준이긴 하지만, 어쨌든.

“괜찮아요. 에키드나. 걱정 말아요.” “황녀님…….”
나는 차분히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저 내 목표는 하나다.
모두가 살기 좋은 제국을 건설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힘을 조금씩 모아야 하고, 대의를 위해서 누군가는 희생되어야만 한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나다.
또한, 사람이 정의하는 대의라는 것의 기준이 모두 다르다는 것도.
그 대의에 몇 차례나 내가 희생될 뻔했다는 것도.
‘나를 향한 암살 시도가 지금까지 132번이었던가.’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아지는 느낌이다.
여하튼, 이런 암살 시도 덕분에 나는 언제나 온몸에 힘이 들어간 채 살아야 했다. 신경은 매 순간 곤두서있다. 언제나 두려움에 노출된 것은 예삿일이다.
덕분에 갖은 잔병치레도 겪고 있고.
하나, 그렇기 때문에 더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나는 같은 답을 들려줄 수밖에 없다.
수백, 수천, 수만 번은 되뇌었던 답을.
“정말 괜찮아요. 에키드나. 저는 그저 가장 이성적이라 생각되는 판단을 내린 것뿐이니까. 제가 건설하는 제국에는 녹스. 그 남자가 필요해요. 그리고…… 뭐 얼굴도 그 정도면 잘 생기기는 했잖아요.” “그건… 확실히 그렇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도 부정하지 못하는 에키드나가 귀여웠다.
어릴 때부터 늘 나를 돌봐주겠다고 나서고 실제로 많은 도움을 줘왔던 그녀다.
난 에키드나 역시 내 힘으로 지켜주고 싶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절대다수’의 이득이었다.
다수가 살 수 있다면 소수의 희생은 감내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이는 황제의 덕목이기도 했다.
한 사람의 목숨과 100명의 목숨의 가치가 같을 수 없지 않나.
그러니 나는 더 노력해야 한다.
오라버니의 세력이 녹스의 활약으로 주춤해진 것은 맞다.
하지만 좀 더 루이 황자를 추락시키지 못한다면, 나는 자연스레 세력 구도에서 밀리게 될 것이다.
때문에 녹스가 필요하다.
녹스 또한 이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내가 필요해졌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
또 ‘공리’를 위해서 우리는 긴밀하게 엮여 있는 것이다.
나는 이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녹스를 사랑하진 않아요.” 때문에 나는 그렇게 차분히 이었다.
“하지만 내 사랑의 값으로 수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면. 그깟 사랑, 일시불로 지불해버릴 수도 있죠. 뭐, ……그 얼굴이면 정말로 사랑해버릴 수도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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